제5장: AI 시대, 실물 자산이 빛나는 이유
4-4 · AI가 만드는 새로운 통화 위기
조회 392
화폐 발행의 가속과 금의 재발견
이 장의 마지막 고리에 이르렀다. AI가 노동시장을 흔들고 사회가 그 충격을 화폐로 달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왜 금이 다시 발견되는가. 모든 실을 여기로 모아 매듭짓자.
먼저 단순한 진실 하나. 돈은 그 양이 늘면 가치가 묽어진다. 세상의 물건과 자산의 양은 그대로인데 화폐만 두 배로 늘면, 같은 물건을 사는 데 드는 돈도 대략 두 배가 된다. 화폐의 가치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것은 이념이 아니라 산수다. 우리는 이미 7장에서 1971년 닉슨 쇼크 이후 종이돈이 금이라는 닻을 끊고 끝없이 풀려나, 같은 금 1온스를 사는 데 드는 달러가 35달러에서 수천 달러로 불어난 역사를 보았다. 화폐 발행의 가속은 금값 상승의 다른 이름이었다.
숫자로 그 규모를 보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총자산은 2008년 금융위기 이전 약 9,000억 달러였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이 규모는 8조 달러를 넘어 2022년 약 9조 달러 가까이 치솟았다. 불과 십수 년 사이에 약 아홉 배가 됐다. 유럽중앙은행(ECB), 일본은행(BOJ), 영란은행(BOE)도 마찬가지 방향으로 움직였다. 세계 주요 중앙은행의 총자산 합계는 2020~2022년 사이 수십 조 달러 규모로 팽창했다. 이 돈이 모두 실물 생산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같은 기간 금 가격은 온스당 1,000달러 초반에서 2,000달러 이상으로 올랐다. 화폐 팽창과 금 가격의 상관 관계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의 기록이다.
이제 AI가 이 그림에 들어온다. 앞 절에서 보았듯, AI가 노동시장에 충격을 주면 사회는 그 고통을 완화하려 한다. 실직자를 지원하고, 소득을 보전하고, 경기를 떠받치는 일—이 모든 것에는 돈이 든다. 그리고 그 돈은 대개 새로 찍어 내는 방식으로 마련된다. 즉 AI가 부른 사회적 충격이, 화폐 발행을 가속하는 압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생산성은 기계가 끌어올리고, 그 충격은 화폐를 풀어 달래는 구조다.
원화 보유자의 관점에서 이 구조를 보자. 글로벌 통화 팽창이 벌어질 때 원화의 구매력은 두 방향에서 압박받는다. 하나는 글로벌 물가 상승이 수입물가를 통해 국내로 전달되는 경로다. 다른 하나는 한국도 경기 방어를 위해 자체적으로 통화를 완화하면 원화 가치가 직접 희석되는 경로다. 어느 쪽이든 원화 표시 자산의 구매력은 줄어든다. 원화로 환산한 금 가격은 달러 금 가격에 원·달러 환율이 곱해진 결과다. 달러 금 가격이 오르거나, 원화가 약해지거나, 둘 다 일어나면 원화 표시 금 가격은 배가되어 오른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이 현상은 이미 한국 투자자들이 직접 경험했다.
여기서 비대칭이 다시 등장한다. 화폐가 빠르게 풀리는 시대에, 현금과 예금처럼 화폐 단위로 고정된 자산은 가만히 앉아 가치를 잃는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구매력이 녹아내린다. 반대로 금은 그 양을 인간이 마음대로 늘릴 수 없는 자산이다. 땅에서 캐내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고, 누구도 버튼 하나로 금을 두 배 찍어 낼 수 없다. 세계금협회(WGC)에 따르면 인류가 지금까지 채굴한 금의 총량은 약 21만 톤이며, 연간 신규 채굴량은 약 3,500톤 수준이다. 총재고 대비 연간 공급 증가율은 약 1.52퍼센트에 불과하다. 주요 법정화폐의 통화량 증가율이 이를 수배수십 배 웃돌아 왔다는 사실과 대비된다. 바로 이 '늘릴 수 없음'이, 화폐가 무한정 늘어나는 시대에 금을 다시 빛나게 한다.
중앙은행들의 움직임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세계금협회에 따르면 각국 중앙은행의 금 매입량은 2022년 약 1,082톤, 2023년 약 1,037톤으로 2년 연속 1,000톤을 넘어서며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특히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달러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금 보유량을 늘리고 있다. 스마트 머니라 불리는 기관들이 달러 약세 또는 통화 질서 재편에 대비해 금을 쌓는 것이다. 이 매입이 지속되는 한, 금 수요의 바닥은 단단하게 받쳐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금의 재발견이라 부른다. 금은 변한 적이 없다. 변한 것은 세상이다. 화폐가 닻을 잃고, 노동이 흔들리고, 자산이 시스템에 묶이는 시대가 되자, 수천 년간 그 자리에 있던 금의 성질—누구의 약속에도 기대지 않고, 인위적으로 늘릴 수 없으며, 전기 없이도 가치를 지니는—이 새삼 절실해진 것이다. 새로운 금이 발견된 것이 아니라, 오래된 금의 의미가 새로 읽히는 것이다.
이 장을 닫으며 정리하자. AI는 귀금속을 산업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그 수요를 키우는 동시에, 디지털 의존과 화폐 가속이라는 두 위험을 키운다. 수요는 늘고, 그것을 대체할 종이 자산의 신뢰는 흔들린다. 이 두 흐름이 만나는 자리에 금이 있다. 그것이 AI 시대가 역설적으로 금을 다시 불러내는 이유다.
출처
- 통화량 증가에 따른 화폐가치 희석(구매력 저하) 원리 | 경제학 일반 | —
- Fed 총자산 2008년 이전 약 9,000억 달러 → 2022년 약 9조 달러 가까이 팽창 | 미국 연방준비제도(FRED WALCL) | https://fred.stlouisfed.org/series/WALCL
- 1971년 이후 통화 팽창과 장기 금가 상승(35달러→2,000달러 이상) | 본서 6-6-2·b-5 | —
- 세계 금 총채굴량 약 21만 톤, 연간 신규 채굴 약 3,500톤(공급 증가율
1.52%) | WGC, Gold Demand Trends | https://www.gold.org/goldhub/data/how-much-gold - 각국 중앙은행 금 매입 2022년 약 1,082톤·2023년 약 1,037톤(2년 연속 1,000톤 이상, 역대 최고 수준) | WGC, Gold Demand Trends | https://www.gold.org/goldhub/research/gold-demand-trends
- 금의 공급 비탄력성(인위적 증발 불가)과 화폐 팽창기의 상대적 가치 | 본서 비즈니스 로직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