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종이를 모으는 자는 가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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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 잔고가 늘었다는 착각
당신의 통장 잔고는 10년 전보다 늘었다. 월급도 올랐다. 숫자만 보면 당신은 분명히 더 부유해졌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부(富)는 숫자가 아니다. 부는 그 숫자로 무엇을 살 수 있느냐다. 그리고 무엇을 살 수 있느냐를 재려면 자(尺)가 필요하다. 당신은 평생 원과 달러라는 자로 자신의 재산을 재 왔다. 문제는 그 자가 해마다 줄어든다는 것이다. 자가 줄면 같은 물건도 더 길어 보인다. 잔고가 커 보이는 이유의 절반은 당신이 부유해져서가 아니라, 재는 자가 짧아져서다.
자가 얼마나 줄었는지는 줄지 않는 자로 재 보면 안다. 나는 금을 쓴다. 금은 5,000년간 같은 금이었다. 우리 거래소가 보유한 일별 금 시세 데이터로 확인해 보자. 1971년 8월, 금 1온스는 42.35달러였다. 2026년 6월 6일, 금 1온스는 4,328.87달러다. 달러로 잰 금값은 약 102배가 됐다. 같은 말을 뒤집으면 이렇다. 금으로 잰 달러의 가치는 50여 년 만에 99% 사라졌다.
추상적인 배율은 와닿지 않는다. 같은 돈을 들고 시점만 바꿔 보자. 1971년 8월에 1만 달러를 들고 있었다면 금 236온스를 살 수 있었다. 오늘 같은 1만 달러로 살 수 있는 금은 2.31온스다.
| 시점 | 금 1oz (USD) | 1만 달러의 금 환산 |
|---|---|---|
| 1971년 8월 | $42.35 | 236.1 oz |
| 1980년 1월 | $559.50 | 17.9 oz |
| 2000년 1월 | $281.50 | 35.5 oz |
| 2026년 6월 | $4,328.87 | 2.31 oz |
정직하게 적는다. 이 길은 한 방향으로만 떨어지지 않았다. 1980년 고점과 2000년 저점 사이에서 금은 크게 출렁였다. 단기 시세를 좇는 사람은 이 출렁임에서 늘 진다. 그러나 50년이라는 자를 대면 결론은 하나다. 화폐로 잰 자산은 커 보이고, 실물로 잰 화폐는 줄어든다.
이 줄어듦에는 시작점이 있다. 1971년 8월 15일, 미국은 달러를 금으로 바꿔 주던 창구를 닫았다. 그날 이후 달러는 어떤 실물에도 묶이지 않은 종이가 됐다. 묶이지 않은 자는 얼마든지 늘릴 수 있고, 늘어난 자는 반드시 짧아진다. 당신의 잔고가 늘어난 이유와 그 잔고로 살 수 있는 금이 줄어든 이유는 같다.
이 착각은 단순한 수치 오류가 아니라, 측정 체계 자체의 문제다. 중앙은행은 매년 돈을 새로 찍고, 새로 찍힌 돈은 기존에 유통 중인 돈의 가치를 조금씩 희석한다. 이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은행 잔고에서 숫자가 빠져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트에서, 주유소에서, 부동산 계약서 앞에서 당신은 이 희석을 몸으로 느낀다. 10년 전에는 30만 원이던 가전제품이 지금은 50만 원이라는 사실, 그것이 희석의 흔적이다.
달러와 원화를 생각하면 그 숫자는 더욱 극명해진다. 한국은 현재 여러 이슈로 환율이 1,500원을 훌쩍 넘어갔다. 당신이 2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통장 잔고를 늘린 그 숫자는, 환율이 1,200원이던 시절에 비해 실질 가치가 오히려 줄었을 수 있다. 달러 기준으로 바꿔 보면 즉각 확인된다. 통장에 3,600만 원이 있을 때 환율 1,200원이면 3만 달러다. 같은 3,600만 원이 환율 1,500원이면 2만 4,000달러다. 숫자는 그대로이지만 달러 구매력은 20% 쪼그라들었다. 당신이 해외에서 물건을 사거나, 수입 원재료 가격이 오른 국내 서비스를 이용할 때마다 이 차이가 실제로 작동한다.
그만큼 어떤 '자'로 계산하는지가 중요하다. 원화로 표시된 잔고를 원화 금시세로 나눠 보면 그 숫자 차이는 더 커진다. 원화는 달러에도 약하고, 달러는 금에도 약하다. 이중으로 희석되는 것이다. 원화로 교환할 수 있는 금의 양은 달러 기준보다 더 큰 차이를 보여 준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숫자를 의심하라고 말한다. 통장의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를 재는 자를 의심하라. 부유해졌는지 알고 싶다면 질문을 바꿔라. "내 잔고는 얼마인가"가 아니라 "내 잔고는 금 몇 그램인가"다. 1트로이온스는 31.1035그램이다. 오늘의 원화 금시세로 당신의 잔고를 나눠 보라. 그 숫자가 5년 전보다 커졌는가, 아니면 작아졌는가. 이 질문에 익숙해지는 순간, 당신은 대다수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시작한다. 그 자가 언제, 왜 줄기 시작했는지가 다음 이야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