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중앙은행은 왜 금을 쌓아두는가 — 본질의 이해
2-4 · 통화 체제 전환의 신호들
조회 488
달러 패권의 균열
지금까지 본 금의 부상은 진공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 반대편에서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금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 무언가란 지난 반세기 세계를 지배해 온 달러 패권이다.
달러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 1971년 금과의 고리가 끊긴 뒤, 달러는 두 가지로 자신의 가치를 떠받쳤다. 하나는 세계 무역, 특히 원유가 달러로 거래된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압도적인 신뢰였다. 모두가 달러를 원했기에 미국은 빚을 내도 부담이 적었고, 그 특권으로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달러는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권력이었다.
이 구조를 더 정확히 이해하려면 '페트로달러 체제'를 봐야 한다. 1973년 닉슨 행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와 협약을 맺었다. 사우디는 원유를 달러로만 판매하고, 미국은 사우디 왕가의 안보를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이 협약이 원유=달러라는 등식을 만들었다. 석유를 사려면 달러가 필요하고, 석유를 파는 나라는 달러를 쌓게 된다. 달러는 에너지를 움직이는 화폐가 되었다. 이 체제가 달러 패권의 실질적 토대였다.
그런데 그 토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미국의 부채는 천문학적인 규모로 불어났다. 2024년 기준 미국 연방 부채는 GDP를 넘어섰고, 이자 지급만으로도 연간 1조 달러를 웃도는 수준이 되었다. 빚이 신뢰의 한계를 시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달러를 무기로 쓰기 시작했다. 적대국의 달러 자산을 동결하고, SWIFT 결제망에서 배제했다. 이는 효과적인 무기였지만 동시에 부작용을 낳았다. 달러를 쓰는 모든 나라가 '언젠가 나도 당할 수 있다'는 불안을 품게 된 것이다. 달러는 중립적 교환 수단이 아니라 미국의 외교 도구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달러의 전략 무기화는 역설적으로 달러 의존을 줄이려는 동기를 전 세계에 심었다.
여기에 관세 전쟁과 보호무역의 흐름이 더해졌다. 미국이 스스로 세계 무역 질서를 흔들면서, 달러 중심 체제의 안정성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패권을 떠받치던 두 기둥, 즉 무역에서의 압도적 사용과 흔들림 없는 신뢰가 동시에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안 결제 체제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달러를 거치지 않는 양국 간 결제를 늘렸다. BRICS 국가들 사이에서 달러 비중을 줄이는 방향의 논의가 진행된다. 중동 일부 국가들이 원유 대금의 일부를 달러 이외의 통화로 받는 실험을 했다. 이것이 당장 달러를 대체하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방향성은 분명하다.
균열이 곧 붕괴를 뜻하지는 않는다. 달러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화폐이고, 그 자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국제 무역의 상당 부분이 달러로 결제되고, 세계 외환보유액의 절반 이상이 여전히 달러다. 달러의 대안이 될 수 있는 단일 통화도 아직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수십 년간 한 방향이던 흐름에 처음으로 반대 방향의 힘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균열의 틈으로 가장 먼저 흘러든 것이 금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 균열을 적극적으로 키우려는 움직임, BRICS의 탈달러 시도를 보겠다.
출처
- 달러 패권의 토대(무역 결제·미국 신뢰)와 그 균열(부채 급증·금융 제재 무기화·관세 전쟁) | 공개 보도·역사 일반 | —
- 1971 금태환 정지 | 본서 프롤로그 | —
- 2024년 미국 연방 부채가 GDP 초과(부채/GDP 약 120%대), 순이자 지급 연 1조 달러 돌파($882B, 2024) | U.S. Treasury Fiscal Data·National debt of the United States (Wikipedia) (https://fiscaldata.treasury.gov/americas-finance-guide/national-debt/) | 2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