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종이를 모으는 자는 가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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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5,000년 vs 화폐 50년
질문 하나로 시작하겠다. 당신은 5,000년간 검증된 것을 믿겠는가, 아니면 55년 된 실험을 믿겠는가.
금은 약 5,000년 동안 인간의 부였다. 고대 이집트의 무덤에서, 메소포타미아의 거래 기록에서, 신라의 금관에서, 금은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제국이 일곱 번 일어섰다 무너지는 동안에도 금은 금이었다. 반면 지금 당신의 통장에 찍힌 달러와 원, 그러니까 어떤 실물에도 묶이지 않은 종이돈 체제는 1971년에 시작됐다. 겨우 55년이다. 인류 화폐사를 하루 24시간으로 압축하면, 불환지폐는 자정 직전 16분에 불과하다.
이 대비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기원전 2600년, 이집트 파라오들은 무덤에 금을 쌓았다. 그로부터 4,600년이 지난 1922년, 투탕카멘의 무덤이 열렸을 때 그 금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금 마스크, 금 관, 금 장신구들은 4,600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 자리에 종이가 있었다면 어찌 됐겠는가. 중국 송나라가 11세기에 발행한 최초의 지폐 교자(交子)는 200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초인플레이션으로 폐기됐다. 금은 4,600년을 버텼고, 교자는 200년도 못 버텼다.
왜 하필 금이었는가. 합의나 전통 때문이 아니다. 물성(物性) 때문이다. 금은 원소주기율표의 79번 원소다. 산소와도, 물과도, 산과도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녹슬지 않고 썩지 않는다. 5,000년 전 파라오의 가슴을 덮었던 금은 지금 박물관 유리장 안에서 그때 그 빛 그대로다. 철은 부스러지고, 비단은 삭고, 종이는 바스러진다. 금은 그대로다. 부를 시간 너머로 옮기려는 인간에게, 시간이 손대지 못하는 금속은 유일한 답이었다.
또 하나의 물성이 있다. 금은 희귀하고, 그 희귀성은 인위적으로 바꾸기가 극히 어렵다. 지금까지 인류가 채굴한 금의 총량은 약 21만 톤으로 추정된다(WGC 추정). 올림픽 수영 경기장 기준으로 4개 정도를 채울 분량이다. 그리고 매년 광산에서 새로 캐내는 금은 약 3,000~3,500톤 수준이다. 전체 보유량 대비 신규 공급 비율은 1.5% 내외에 불과하다. 반면 중앙은행은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수조 달러를 찍어 낼 수 있다. 희귀성 자체가 금의 본질이고, 그 희귀성은 어떤 정치 결정으로도 바꿀 수 없다.
종이돈은 이 싸움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인류는 여러 번 종이돈을 만들었다. 송나라의 교자, 프랑스 혁명기의 아시냐, 독일 바이마르의 마르크. 발행하는 권력은 예외 없이 더 찍는 쪽을 택했고, 더 찍힌 종이는 예외 없이 휴지가 됐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이 그 극단을 보여 준다. 1923년 11월, 빵 한 덩어리가 2,000억 마르크였다. 수레에 돈을 가득 싣고 가야 빵 한 개를 살 수 있었다. 그때도 금을 가진 사람은 빵을 샀고, 종이를 가진 사람은 종이를 태워 몸을 녹였다. 종이돈의 강점은 편리함이다. 금의 강점은 불멸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둘을 혼동한다는 것이다. 매일 쓰기 편한 것과 평생 부를 지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1968년부터 기록된 금시세 데이터가 이 명제를 그대로 증언한다. 그 50여 년간 변한 것은 금의 가격이지 금의 양이 아니다. 1온스는 언제나 1온스였다. 오르내린 것은 그 1온스에 붙는 달러의 숫자뿐이다. 다시 말해, 데이터가 보여 주는 것은 '금값의 변동'이 아니라 '화폐 가치의 부식'이다. 금은 가만히 서 있었고, 종이가 그 발밑에서 녹아내렸다.
나는 금이 신비롭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금은 이자를 주지 않고, 배당도 없으며, 들고 있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이 5,000년간 부를 지킨 방식이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기에 아무도 그 약속을 깰 수 없다. 종이돈은 누군가의 약속이고, 약속은 깨진다. 금은 약속이 아니라 물질이고, 물질은 배신하지 않는다.
이 비교는 단순한 역사 강의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금을 사 모으고 있다. 2022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중앙은행이 매입한 금은 약 1,136톤이었다(WGC). 1967년 이후 55년 만에 가장 많은 양이다. 달러 체제를 운영하는 자들 스스로가 달러 대신 금을 선택하고 있다. 그들이 5,000년의 역사를 선택하는 것인지, 아니면 55년의 실험을 버리는 것인지, 당신이 판단하라.
그래서 선택은 단순하다. 5,000년이냐 55년이냐. 다음 글에서 나는 이 선택을 당신의 실제 자산에 적용하는 법, 즉 부를 재는 단위 자체를 바꾸는 법을 이야기하겠다.
